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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들/여행누리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셋

風酒醉雨 2024. 5. 28. 09:47

3. 솔 향에 취한 바다, 바다향에 취한 솔숲.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이며 어디가 그 경계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다. 부딪어 오는 파도의 함성만이 이곳이 바다 가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 하얀 포말보다 더 바다답게 나를 맞아주는 것은 여전히 바람, 비릿한 바닷내음 가득 담은 바닷바람이 나를 맞아준다. 기원하는 사람, 기원을 듣는 바다, 사람이 원하는 것, 바다가 해주고자 하는 것.
난 항상 변하지 않고 거기 있는 네가 좋다.
                                                                                                        낙산사 의상대에서 한 낙서
 
낙산 해수욕장 앞에서 내려 낙산사로 향했다. 중학교시절 수학여행으로 왔던 곳,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길을 오른다.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들어갔기에 의상대를 제일 먼저 들렸다. 낙산사를 구경하고 나오는 많은 아이들, 그들도 시간이 지나 이곳에 다시 온다면 나처럼 기억 하나쯤 할 수 있겠지? 문득 친구가 보고 싶어 진다. 바다는 분명 진한 파란색이었는데 의상대 밑으로 보이던 파도는 아주 맑은 우윳빛 이었다. 의상대에서 홍련암을 거처 보타전, 해수관음상(중학교 때는 정말 크다고 생각했는데…)까지 구경하고 낙산사 본전으로 향하는 길, 솔향기 가득한 숲길에 새들의 지저귐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 단체로 오신 어머님들의 불공 드리는 모습에 다시 한번 생각한다. 과연 무엇을 기원하는 것일까? 그냥 궁금할 뿐이다. 얼마나 절실한지, 아니면 그냥 평범함의 기원일지, 본전 입구 천왕문을 지나며 사천왕상을 보았다. 중학교 시절 이곳을 지나며 보았던 사천왕상은 정말 무서웠는데 지금 나에게 보이는 사천왕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슬퍼 보인다. 아마도 사천왕상 위로 쌓여가는 먼지 만큼이나 내 마음위로 쌓여가는 현실에 대한 자각 때문이리라. 잠시 계단에 앉자 쉬는 동안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소나무 숲, 곧기만 한 소나무들 사이로 굽은 소나무가 유난히 시선을 끄는 것은 아마도 아무런 계획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느끼는 선택에 대한 대답처럼 들리기 때문이었을까? 결국은 이렇게 대답을 얻은 것일까? 그런 감상에 잠시 빠져본다.
다시 낙산해수육장으로 내려와 사람구경(?-정말 재미있었다), 바다구경을 하다가 음료수 하나를 사면서 슈퍼아저씨께 물었다. “내일 해가 뜰까요?” 옆에 게시던 아주머니 왈 “해는 매일 떠요!” 우문현답 이시다. 내일 아침 일출은 볼 수 있을 거란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신다. “일출은 여기보다 대청봉이 더 멋있지.” 설악산 입구에서 대청복까지 올라가는데 약 4시간, 일출을 보려면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한다. 맘이 급해 진다. 버스를 타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물으니 4시간이면 대청봉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표 한장 달라고 했더니 매표소 직원분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다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갈려고요?” “대청봉에서 일출 보려고 하는데요.” 했더니 “대청봉은 5월 31일까지 입산금지 인데 몰랐어요?”하신다. 이런 다시 살펴보니 주위에 3월부터 5월 말까지 입삼금지라는 표지판에 커다랗게 붙어있었다. 또 한번 느낀다. 내가 결정했으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다시 낙산으로… 새벽 4시 30분 일어나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는데 벌써 어둠을 밀어내는 푸르름이 어슴푸레하게 공간을 감싼다. 카메라를 셋팅하고 바다를 바라본다. 오늘도 날이 아닌 듯 하다. 하늘 밑으로 가득한 먹구름이 쉬 보여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처럼 느껴진다.
서서히 여행을 마무리하며 강릉으로 향했다. 강릉에서 다시 정동진으로, 다 망가진 정동진이지만 그 곳에서 바다를 보며 청량리행 열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3년 전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 정동진역 우측으로 보이는 곶 위에  아주 커다란 배모양의 호텔이 들어서고 있었다. 나도 인간이지만 정말 인간들이란..! 자연을 돈으로 보는 인간들 때문에 좋은 여행지가 다 망가져 간다. 그렇게 바다를 보면서 이번 여행을 정리한다.
철길 옆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지 어언 2시간 아저씨 한 분이 옆에 앉는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니 살고 있는 곳 이야기도 나오고, 얼마전까지 우리집 옆 아파트에 살았단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저녁식사와 함께 소주 3병, 해변에 앉아 캔맥주 8개, 맥주집에서 카프리 6병, 다시 자리를 옮겨 양주 2병 그렇게 난 여행을 정리하던 마지막날 여행 중 처음 술을 먹고 시체가 되고, 그렇게 이틀을 더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여행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여행은 끝내는 여행이 아니라 서서히 잊어가는 여행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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